"어제 미안해요. 답장 못 해서. 사정이 좀 있었어요.."
"괜찮아요. 정경씨 일이에요? 어젯밤에 정경씨랑 있었어요.
준영씨가 정경씨한테 전화했을 때요.."
"좋은 일은 안궁금해요?"
"아! 맞다. 좋은 일 있다고 했죠? 뭐예요?"
"대학원 시험 보기로 했어요. 서령대요."
"그래요. 잘 될 거예요."
"고마워요."
"우리 친구 하자고 했었죠? 준영 씨가....
근데 얼마든지 힘들 때 연락하래 놓고 말 바꿔서 미안한데요.
나 준영 씨랑 그런 친구는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힘들 때 보고 싶다면서 그래서 만나자 해놓고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가 힘든지 아무 얘기도 안 해주고..
그런 거, 그런 친구는 안 할래요."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늘도 무슨 일이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속상하다. 힘들다. 울고 싶다.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친구를 하고 싶었다.
손끝에 굳은살이 단단해지면
마음의 굳은살도 단단해질 것만 같았다.
어차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녔다고
그러니까 이제 괜찮을 거라고
매일매일 주문을 걸었었는데.....
괜찮지 않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어쩌지 못할 만큼 아주 많이
"좋아해요... 준영 씨.. "
마음에 굳을 살에 기대 보려던 나의 야침찬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피아노와 그의 사랑과 그의 친구와
행여나 넘쳐버릴까 봐 비우고 또 비우려 애썼던
그의 마음에 대해 들었다.
"트로이메라이는 습관 같은 거였어요.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서 그 곡을 치고 나면
밤새 가득 찾던 마음이 좀 비워지는 거 같아서."
"정경씨 어머니 사고가 준영씨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마음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미안해요 이런 얘기 해서....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기다려 줄 수 있어요?"
"네. 기다릴게요"
"저 여기 앉아도 돼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모르는 사람처럼..."
"누구세요?"
"영화에서 맨날 남자가 여자 신발 끈 묶어 주잖아요?"
"영화요?"
"네."
"그럼 여자가 남자한테 반하는데요? 난 반하기 싫거든요!! "
"송아씨... 그런 일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
"믿어요. 믿어요. 그런데요...
정경씨랑 사이에 그러니까 그 시간들 사이에
제가 들어갈 자리가 있어요?
저 준영씨 기다릴 건데 기다리는데
그래도 그건 알고 기다리고 싶어요."
"...................................................................."
"갈게요... 저..."
(마주쳤지만.. 가벼운 목례만 하고 강의실로 들어가 버리는 송아.....)
"정경이 불편하지 않겠어요?"
"편하진 않죠."
"근데요. 준영 씨에 대한 내 감정도 중요하지만
나한테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다른 것들도 있어요.
지금 나한테는 대학원 입시가 정말 중요해요.
그래서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 감정에 휘둘려서 놓치고 싶지 않아요. 갈게요."
"아까 교수님이 말한 그 소문이요.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당황스럽긴 한데....
서운해요. 준영 씨가 그렇게 까지 말하니까
서운해요.. 이상하게... "
"송아씨 때문에 그랬어요.
소문 때문에 송아씨 곤란해질까 봐 신경 쓰여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준영 씨는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난 준영 씨 말 한마디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신경 쓰여요.
그런데 이제 그러기 싫어요. "
"잘했어요? "
"많이 배웠어요."
"기다렸어요. 나도 신경이 쓰여요.
송아씨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할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요?"
"네. 그럴게요...."
그냥 사귀지... 이런 생각 했었지만..
오랜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 시간이 걸리는 것임을.....
이젠 조금 알 듯도 하다....
"뭐해요?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준영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오케스트라자리배치표!!)
"그냥 수업 공지요... 어?! 오늘 좀 피곤해 보여요. "
"아니요. 괜찮아요. 수업 끝난 거예요?"
"레슨 받고 왔어요."
"와! 엄청 열심히 했나 보다. 점심은요?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어쩌죠? 밖에서 약속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할 거 같아요."
"누구 만나요?"
"그냥 좀 아는 사람이요."
"그렇구나"
"그럼 저는 가볼게요.. 점심 맛있게 먹어요."
"네. 송아씨도."
"레슨 잘 받았어요?"
"네... 뭐..."
"송아씨는 오늘 뭐했어요?"
"대학원 입시곡 반주 맞춰봤어요.."
"좀 무서우시더라고요."
"반주야 언제나 중요하지만 이번에 입시닌까
교수님도 특별히 좋은 반주자를 구하라고 하시는데...
이번 반주 선생님이랑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선의도 급 따져가면 베풀어라며 오히려 민폐 될 수 있다는 교수놈의 말이 신경 쓰이는 준영)
"처음 맞춰보는 거라서 그럴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오케스트라 자리 배치표 뜯는 준영... 그걸 또 들켜요.......
"월드클래스 아티스트라 학교 오케스트라 끝자리에 앉는 사람은
아무래도 급이 안 맞을 까요?"
(정말로 성적준으로 자리배치인가요?! ㅡㅡ)
"요새 이상하게 급 따지는 사람들이 많네요.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
"그럼 왜 뗐어요? 오케스트라 자리 배치표요."
"송아씨가 신경 쓰는 게 싫어서요..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연연하고 마음 다칠까 봐
그게 싫어서 그랬어요."
"오케스트라 자리요. 의미 없지 않아요.
너무 큰 의미예요. 나한테.. 그래서 연연해요...
한자리만 더 옆이었으면 한 줄만 더 앞이었으면
지난 4년 내내 그랬어요. 이해 안 되죠?
아마 평생 이해 못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쩌면 내가 준영씨하고
나란히 서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이 좀 없어져요."
"그럼 왜 기다린다고 했어요?
그래서 요즘 나 계속 밀어낸 거였어요?
그럼 좋아한다 기다리겠다. 왜 했어요?
밥 같이 먹자는 말에 우리는 급이 안 맞지 않냐.. 이런 대답이라면
나 송아씨한테 못 가요.
나 이런 얘기 듣는 거 진짜 지겹고 지쳤는데
송아씨 한 테까지 듣고 싶지 않아요.
정말 미안한데 먼저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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