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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기억하고 픈 글

사는 것과 살아내는 것

by 내성적인마녀 2021.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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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비슷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의미는 극과 극이다. 우리는 매일 오늘 하루를 보낼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살 것인가, 살아 낼 것인가?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정신 레벨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살아내는 하루'는 아프고 슬프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그가 하루만큼의 시간을 견뎌냈다는 의미이다. 다른 이가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해내는 노예의 삶이다. 직장을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출근해 그날그날 지시받은 일을 마지못해 대충 처리하는 직장인, 이혼이 두렵고 경제적 능력이 없어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식구들을 위해 밥하고 청소하며 푸념하는 주부,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의 심리 상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무기력한 상태에서는 사는 것이 아니고 살아내며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세 단계로 설명했다. 살아낸다는 것은 니체가 인간 정신의 세 단계 중'낙타'로 표현한 단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등에 짐을 잔뜩 싣고 사막을 횡단하다가 죽어가는 낙타의 삶과 같다. 당신이 만약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늙은 낙타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정말 힘들고 억울하지 않을까? 그러다 힘이 떨어져 쓰러지면 그 짐은 젊은 낙타에게 옮겨 싫을 것이고, 일어나지 못하는 낙타를 버려두고 대상 행렬은 계속 사막을 횡단할 것이다. 많은 직장인이 이런 인생을 살고 있다. 하루의 품삯을 위해 낙타처럼 견디며 간신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 

 

이에 반해 '하루를 산다'는 것은 포효하는 사자처럼 사는 방식을 말한다. 하루를 사는 사람은 사자같이 주도적이고 스스로가 고용주가 된다. 사자는 자신이 원할 때 사냥하고 먹는다. 그러고는 초원에서 며칠씩 휴식을 취한다. 초원에서 사자에게 간섭할 다른 동물은 없다. 사자는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다.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남의 인생이 아닌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 또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지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의 대가를 모두 취한다. 이는 '자발성'에서 나온다. 자발성이란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결정해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에서는 무기력이 자발성이 사라진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려면 자발성을 회복해야 한다. 사자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는 인생을 되찾고, 그런 삶을 계속 살아나가는 것을 꿈꿔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낙타가 아니라 사자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쉽지 않다. 특히 무기력하게 낙타처럼 사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사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노력 여하에 따라 진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절망의 연속일 만큼 혹독하다. 

 

그러나 더러운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무기력의 절망은 '새로운 배움'을 남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무기력의 절망속에서 깨닫게 되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 인생에서 보장된 것은 별로 없고 삶은 결코 만만치 않으며,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확실히 배우게 된다. 그런 깨달음을 얻으면 사막에서 낙타가 죽는 그 자리에서 사자가 태어나 포효할지 모른다. 사자가 지니고 있는 자발성을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 정신 진화의 목표이다.  

 

낙타가 죽을 때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 자발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순간, 자신처럼 살아내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는 절망 속에 허우적댄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이웃과 함께 아파할 수 있다 다른 이의 아픔에 공명할 수 있다면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소설「그리스 인 조르바」 에서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고자 애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남을 돌보다 보면 자신을 구할 길도 찾을 수 있다.

 

다른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눈을 뜬다. 남에게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을 즐기며 공헌을 즐기고 인생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비로소 니체가 말한 세 번째 단계인 '어린아이의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천진함과 솔직함, 창조의 상징이다. 아이는 수천 번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수없이 옹알이 하다가 말을 배우고 넘어지길 반복하며 걸음마를 배운다. 천진하고 호기심이 강해 어떤 상황에서든 창조하고 변화를 추구한다. 아이는 계산 없이 사랑을 주고 아플 때 울고, 기쁠 때 마음껏 웃는다. 천진난만함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아무런 한계도, 억압도 없이 어떤 일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는 사자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은 두 번째 정신 진화로 이어진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무기력의 고통이 그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문제는 무기력이다」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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